
이름 : 콜미: 사투르니노 (Call me: Saturnino)
품종 : 오가닉 템프라니요 & 모나스트렐
생산년도 : 2021년
생산지 : 스페인
구매처 : 라빈 리커 스토어
가격 : 17,900 원
갑자기 속절 없이 게임에 빠져버린 날. 어느새 눈 밑 깊게 자리잡은 다크서클을 느끼며 '오늘은 글렀다. 그냥 하루 버린 셈 치지 뭐' 하며 위안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 뭔가 하기는 했는데 한 달을 뒤돌아 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업무 성과가 없다. 그럴 때 '일 년 12개월인데 남은 11개월을 알차게 살면 대충 버무려지지 않나' 하면서 넘긴 적도 있을 것이다 (나만 그런 가?!). 그렇다면 1년은 어떤가. 20대는 10년인데 1년 쯤이야.. 이렇게 치부할 수 있을까?
세상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빨리 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것만 같다. 세상사에 이골이 난 회사원이 돌연 세상을 등지고 10년 동안 자연인으로 살았다면,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나던, 지금 국가 원수가 누구이건, 빨간빛 혹은 파란빛으로 국회가 장악되어 있건 그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세상은 제작년에 심은 수박씨가 어느새 커서 자기가 나온 그 만큼 커다란 수박이 되었거나, 틈틈이 모은 자재들로 오두막 별채를 완성했다거나.. 그런 것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런 생활이 10년이던지 아니면 9년이던지, 아니면 11년 8개월 쯤 되었을지도.. 그렇게 디테일한 시간은 중요치가 않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갑자기 소식이 들려온다. 하나 밖에 없는 형에게 자식이 생겼단다.
젠장 그건 세상에 아무 관심이 없는 그에게도 '제법' 큰 일이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주식시장의 등락보다도 훨씬 직접적이다. 쉽게 내뱉을 수 있는 10년? 아니 11년이던가.. 하는 그 사이 시간동안 나와 아주 가까운 생명이 없다가, 생겨난 것이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그의 조카를 위해 나뭇가지로 피리를 만든다. 아니면 왕년에 회사다닐 때의 실력을 발휘해 아이에게 선물해 줄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당차게 노트북을 하나 구해올 지도 모른다. 아이는 빠르게 클 것이고, 그 속도에 맞춰 그의 시간은 이제 아주 세세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자연인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그 일이 진짜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저께까지는 3×살이던가 3☆살이던가 긴가민가 였지만 이제부터는 확실히 어느 나이인지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는 별로 대단치 않을 수도 있는 그 1년 동안 나와 가까울 수 있는 그 아이는 젖을 때고 이유식을 먹고 걸음마를 때고 옹알이를 하기 시작할 것이니까. 아이의 힘이란! 아직 세상의 웅덩이에 발걸음을 떼지 않은 말캉한 발 뒤꿈치와 밥 먹다 돌을 씹어보지 못한, 발치의 무서움을 모르는 앙냥한 턱과 볼살이 물들어가는 이 세상이 좀 더 살기에 아름다웠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이의 탄생 100일을 기념하는 자리에 가기 위해 라빈 리커 스토어를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2만원이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픽업할 수 있는 이 와인, 콜미: 사투르니노 레드와인은 오가닉 공법으로 키운 템프라니요와 모나스트렐 품종으로 빚은 레드블렌드 와인이다.
잔을 잡은 손가락이 반투명하게 보이는 정도의 투명한 보랏빛을 감상하다 한 모금, 상큼한 베리향을 느끼며 또 한 모금. 바디감은 가득하면서 탄닌의 떫음이나 비릿한 오크향은 전혀 없는 아주 상-큼한 느낌이다. 오가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혹은 반대로 현혹될 이유가 없다. 그런 수식어가 없어도 그냥 맛과 향으로 2만원에 맛보기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와인이니까.
평점: 🌕🌕🌕🌕🌗
늘 느끼는거지만 라빈 리커 스토어는 물건을 참 잘 고른다.
데일리 까베르네 소비뇽의 양산형 와인맛과 저가 피노 누아의 비릿함이 싫으신 분들께 적극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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